'고민하는힘'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1.03.28 [서평] 고민하는 힘 - 강상중 교수 (3)
2011.03.28 07:30

[서평] 고민하는 힘 - 강상중 교수



재일자녀인 강상중 도쿄대 교수가 쓴 고민하는 힘은 정말 진지하게 삶에 관한 고민을 풀어나간 책이다. 철학책같기도 하고, 수필같기도 하고, 그냥 인문서적인가 싶기도 하다. 살아가면서 한번쯤은 고민하는 질문들을 하나하나 깊게 생각한다. 그런데 그 질문을 답해 나가는 원천은 바로 책이다. 강상중 교수의 대답들은 독서에 기반을 두고 나온 것들이다. 어렵지도 않고,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은 고민하는 힘은 청춘의 시절에 방황하는 이들에게 한번쯤 읽어볼만한 책이다.




무엇이 살아갈 힘이 될까?

우리는 자유를 얻는 대가로 관습이라는 제동장치 대신에 살아갈 수 있는 추진력이 될 무언가를 각각 손에 넣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결국 그것만이 죽음에 대한 억제력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현대에는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인간사의 부흥과 자유의 시대를 맞이했다. 하지만 그에 따른 대가가 많이 생겼다. 누군가의 지시에 따라 살아갔던 삶은 편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도 우리를 향해 지시하지 않는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 대세, 유행, 군중심리는 여전히 있다. 그렇지만 이제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은 바로 우리 자신안에 있다. 심장을 뛰게하는 일, 그 일을 찾지 못하면 결국 우리는 죽게 될지도 모릅니다. 아니 살아도 사는게 아닌 삶을 살게됩니다.



 

돈이 세계의 전부인가?

"평소에는 모두 착한 사람입니다. ...... 그것이 막상 다급해지면 갑자기 악한 사람으로 변하기 때문에 무서운 거예요" 라는 선생의 발언에 대해 '내'가 "내가 묻고 싶은 것은 막상 다급해진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라고 되묻는 장면이 있는데 그때 선생의 대답이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돈 얘기지요. 돈이라면 어떤 군자라도 바로 악한 사람으로 만들 수 있지요."



어떤 군자도 돈 때문에 악한 사람이 된다는 대답이 인상깊다. 나 또한 돈에 얽매여서 살고 있는 것 같아서 슬프다. 언제쯤 돈의 속박에서 자유로울 수가 있을까?




제대로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와 관련해서 요즘 사람들은 '알고 있다', '모른다'라는 것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몰라?" 라고 질문을 받았을 때 "몰라" 라고 대답하면서 지나치게 수치심을 느낍니다. 실제로 "몰라"라고 대답하면 "에이, 그런 것도 몰라?" 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이것은 정보의 서랍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을 지성이라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을 모르면 어때" 하고 말하고 싶은 것이 나뿐일까요?
물론 '무엇이든 알고 있는 박식한 사람'은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본래 '박식한 사람', '정보통'과 '지성'은 엄격하게 구분된다고 생각합니다. '알고있다(know)'와 '사고하다(think)'는 다릅니다. '정보(information)'와 '지성(intelligence)'은 같지 않습니다.




마지막 문장이 뇌리에 박힌다. 많은 나이많은 사람들 혹은 높은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 덕분에 많은 실수와 당황스러운 일들이 발생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오히려 자신의 모름과 실수를 인정하는 사람이다.




 

청춘은 아름다운가?

나는 청춘 시절부터 '나'에 대한 물음을 계속하며 '결국 해답은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아니 그보다 '해답을 발견할 수 없지만 내가 갈 수 있는 곳까지 갈 수밖에 없다.'라는 해답을 찾았습니다. 그러자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갈 수 있는 곳까지 갈 수밖에 없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얼음 위를 지치듯 모든 일의 표면만 지친다면 결국 풍성한 것은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청춘은 좌절이 있기 때문에 아름답고 실패가 있기 때문에 좋은 것입니다.
나이를 먹어도 청춘의 향기를 잊고 싶지 않습니다.


결국 다다를 수 없는 곳을 향해 계속 나아갈 수 밖에 없다. 그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을 뿐이다. 내 이전에도 있었고, 내 이후에도 있을 그 곳을 향해서... 청춘의 중간에 서있는 나... 돌아오지 않을 청춘의 여름날.






그러나 늦게 온 우리 뮤즈의 이 발명품도
우리 병든 인종이 젊음에 바치는
깊은 흠모를 막지 못하리,
-성스러운 젊음, 순박한 모습, 다정한 이마
흐르는 물처럼 맑고 깨끗한 눈동자,
그 향기, 그 노래, 그 부드러운 열기를
하늘의 푸름처럼, 새처럼, 꽃처럼 무심코
모든 것 위에 널리 퍼트려 주는 젊음에!

-보들레르의 [저 벌거숭이 시대의 추억을 나는 좋아한다] 중에서






Trackback 0 Comment 3
  1. 2011.03.31 12:57 address edit & del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Favicon of https://solnamu.tistory.com 2011.03.31 23:59 신고 address edit & del

      철아~ 근데 너 어떻게 내 블로그 알고 찾아왔니!? 신기하네!?

  2. Favicon of https://soulco.tistory.com 지성의 전당 2019.01.18 19:10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안녕하세요.
    저는 지성의 전당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데,
    고민하는 힘 글이 있어서 댓글을 남겨 보았습니다.
    제가 또 댓글을 달았다면 죄송합니다.
    인문학 도서인데,
    저자 진경님의 '불멸의 자각' 책을 추천해드리려고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와 죽음에 대한 책 중에서 가장 잘 나와 있습니다.
    책 내용 중 일부를 아래 글로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제 블로그에 더 많은 내용이 있으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정보를 드리는 것뿐이니
    이 글이 불편하시다면 지우거나 무시하셔도 됩니다.
    ---

    인식할 수가 있는 ‘태어난 존재’에 대한 구성요소에는, 물질 육체와 그 육체를 생동감 있게 유지시키는 생명력과 이를 도구화해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의식과 정신으로 나눠 볼 수가 있을 겁니다.

    ‘태어난 존재’ 즉 물질 육체는 어느 시점에 이르러 역할을 다한 도구처럼 분해되고 소멸되어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육체를 유지시키던 생명력은 마치 외부 대기에 섞이듯이 근본 생명에 합일 과정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육체와의 동일시와 비동일시 사이의 연결고리인 ‘의식’ 또한 소멸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추후에 보충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이러한 총체적 단절작용을 ‘죽음’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존재의 일부로서, 물질적인 부분은 결단코 동일한 육체로 환생할 수가 없으며,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의식’ 또한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정신은 모든 물질을 이루는 근간이자 전제조건으로서, 물질로서의 근본적 정체성, 즉 나타나고 사라짐의 작용에 의한 영향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타날 수도 없고, 사라질 수도 없으며, 태어날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불멸성으로서, 모든 환생의 영역 너머에 있으므로 어떠한 환생의 영향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신에 대한 부정할 수가 없는 사실이자 실체로서, ‘있는 그대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본체에 의한 작용과정으로써 모든 창조와 소멸이 일어나는데, 누가 태어나고 누가 죽는다는 것입니까?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을 하고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윤회를 합니까?

    정신은 물질을 이루는 근간으로서의 의식조차 너머의 ‘본체’라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윤회의 영역 내에 있는 원인과 결과, 카르마, 운명이라는 개념 즉 모든 작용을 ‘본체’로부터 발현되고 비추어진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자신을 태어난 ‘한 사람’, 즉 육신과의 동일성으로 비추어진 ‘지금의 나’로 여기며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착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한 사람’은 스스로 자율의지를 갖고서,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행동한다고 믿고 있지만 태어나고 늙어지고 병들어지고 고통 받고 죽어지는, 모든 일련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어느 것 하나 스스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책임을 외면하기 위해 카르마라는 거짓된 원인과 결과를 받아들이며, 더 나아가 거짓된 환생을 받아들이며, 이 과정에서 도출되는 거짓된 속박, 즉 번뇌와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환영 속의 해탈을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는 ‘나는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거짓된 자기견해 속의 환생과 윤회는, 꿈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더불어서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정의를 내리려면 반드시 비교 대상이 남아 있어야 하며, 대상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는 그 어떠한 자율성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는 꿈속의 꿈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뚜렷하고 명백하다 할지라도 ‘나뉨과 분리’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나’에 대한 그릇되고 거짓된 견해만을 바로잡았을 뿐입니다.

    https://blog.naver.com/ecenter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