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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16 11:12

<미> 남해에서 온 아름다운 시집

<미> 류혜란 지음, 몽당출판사

시는 마음이고, 시인의 마음을 들키는 것이라 한다. 나는 시란 마음인 동시에 시인의 삶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류혜란 시인의 시들이 담긴 시집 <미>는 류혜란 시인의 마음과 삶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처음 류혜란 시인을 알게 된 건 인터넷 sns 페이스북에 쓰인 시 글귀를 통해서였다. 시인은 자신의 시를 홈페이지를 통해서 공개했었고, 또 그 시들이 페이스북에도 올라와 있었다. 난 차분히 페이스북에 올라온 시들을 읽어 내려갔고, 류혜란 시인의 팬이 되었다.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다른 시들도 읽어보고, 류혜란 시인이 그동안 낸 시집을 모두 구매했다. 시인의 페이스북도 구독하며 시인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시인은 서울에서 살다가 프로그래머인 남편과 함께 남해로 이사를 갔다. 그리고 남해에서 출판사를 차리고 매해 12월 25일이면 한 해 동안 쓰인 시들을 모아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시집을 출간한다. 나도 서울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가족과 함께 제주도로 이사를 했었던 터라 남해로 이사 간 시인 부부의 이야기가 공감이 되었다. 결이 비슷한 사람이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숫자와 영어로 이루어진 프로그래밍 언어로 컴퓨터와 대화하는 이과 남편과 가장 아름다운 시어를 찾아 독자와 대화하는 문과 아내라니 정말 이상적인 조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햇살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남해의 풍경과 소박하게 그리고 투닥거리며 살아가는 시인 부부의 삶을 들여다보는 건 또 다른 재미가 있었다.

"머물고 싶은 곳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있다."

시인의 삶을 가장 잘 표현하는 문구다. 프로그래머 남편분의 페이스북 자기소개글에 적힌 글귀이다. 누구나 꿈꾸는 삶이지 않을까? 머물고 싶은 곳에 살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산다. 누구나 원하지만 모두가 그 꿈을 이루고 살진 못한다.

류혜란 시인의 삶은 그대로 시에 담겨 있다. 남해에서의 삶 이야기, 그리고 세월호 사건에 슬퍼하는 마음이 담긴 시, 사랑에 대한 시 그리고 자연의 아름다운을 이야기하는 시들이 시집 <미>에 있다. 나는 마음이 무거울 때마다 미 시집을 펼쳐 들고 딱 하나의 시를 읽곤 한다. 그럼 새롭게 시가 다가오고, 차분해지곤 한다. 다시 읽을 때마다 마음에 드는 시가 늘어나지만 그중에서 2개의 시를 함께 나누고 싶다.


노을미용실



나 동쪽 바닷가에 산다

저편 서쪽 바닷가 할머니

마주칠 때마다 파마 좀 하라시는데

난 생머리 주의라 질색

저편 노을미용실로 끌고 사실 것만 같다


나 빨래 널고 잊는데

할머니 저녁이면 물장구치듯 쫓아와

빨래 걷으라, 물오리처럼 귀 쫀다

나, 잡초도 존중한다, 도 닦는 소리하는데

할머니는, 흉하다, 흥흥 토라지신다


마음 안 맞춰지는 할머니가 계신 저편

그리하여 나 틈틈이 바라본다

물오리 기다리는지 어느덧 걱정하는지

구시렁구시렁 서쪽 내게로 배어들어


결국 노을미용실 찾아가 파마 말고 보게 된,

내 집에선 안 보였던 엄청나게 시적인,

매번 낯선 색의 노을 때문에

언제부턴가 나 저편에 넘나들며

할머니 친구 되어가는 꿈꾼다.


시인의 남해에서의 일상을 보여주는 <노을미용실>을 읽다 보면 마치 내 눈앞에 할머니와 시인의 모습이 그려지는 듯하다. 시골에 가면 의례 있을 법한 할머니와 이제 막 도시의 삶을 정리하고 이도향촌 한 젊은 새댁의 투닥거림이 너무나 정겹다. 그리고 파마 좀 하라는 할머니의 잔소리에 생머리 주의라고 질색하던 시인이 시의 마지막에는 결국 파마를 했다고 하는 반전이 귀엽다. 그리고 할머니처럼 파마를 하고 바라본 하늘의 노을. 그곳에서 노을미용실 시어들을 지어낸 것만 같다. 아름다운 노을과 함께 그리고 할머니와 친구가 되어가는 시인의 꿈이 오롯이 담긴 즐거운 시다.

무엇보다 이 시를 쓰고, 시인이 자신의 파마한 사진을 올려주어서 더 재미있었다. 이제 시로만 독자와 만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삶으로 독자와 소통할 수 있게 된 세상이다. <노을미용실>은 기승전결이 담겨있어 시이면서도 짧은 한 편의 소설 혹은 에세이 같기도 하다. 시가 어렵지 않고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져서 좋다.

나도 제주로 이사 오고 부쩍 할머니들과 만나고 이야기 나눌 기회가 많아졌다. 길가에서 만나는 분들은 대부분 할머니이었고, 할머니는 어쩌다 만난 젊은 아빠와 아기를 보고 그냥 지나쳐가는 법이 없었다. 날씨가 좋은 오후에 아기를 재우려고 유모차에 태우고 산책을 하다 보면 제주의 할망들이 제주 사투리로 이렇게 말을 걸곤 하셨다. "아이고, 아꼽다. 아가가 잘생긴 아방 닮았구나" (아이고, 예쁘다. 아기가 잘생긴 아빠 닮았구나.) 처음 제주에 왔을 땐, 제주어라곤 관광지 시장에 적혀있는 "혼저옵서예"(어서오세요) 정도밖에 몰라서 제주 할망들이 하시는 제주 방언을 하나도 못 알아 들었다. 아기도 예뻐해 주시고 아빠가 아기를 돌본다고 칭찬을 해주시는데 그냥 모른 척 갈 수도 없고, 무슨 말씀을 하시는진 몰라서 그저 "예, 예" 하면서 한참을 길에 멈춰 서서 할머니들의 대화 상대가 되곤 했었다. 어쩔 때는 아기가 유모차에서 잠이 들어서 아기가 깰 때까지 2시간에 가까운 시간을 할머니의 말 상대가 되어드린 적도 있었다.

다행히 이제는 제주어도 많이 공부하고, 할머니들과 대화도 익숙해져서 길에서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드리곤 한다.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다 보면 제주의 역사부터 문화까지 재미있는 일화를 많이 알 수 있다. 옛날 옛적에 제주도가 어땠었다는 지금의 나는 상상도 못 할 법한 사실을 들려주신다. "할머니 친구 되어가는 꿈 꾼다."는 <노을미용실> 시의 마지막 문구처럼 나도 제주 할머니들과 친구가 되어가는 꿈을 꾼다.


여기서 꽃이어야



님아, 여기서 꽃이어야

다른 곳에서도 꽃이지


동굴에 홀로 피었다지는 꽃이어야

부케의 틈에서도 진심을 쏟아 살다가는 꽃이지


낙조 이후에 당당한 꽃이어야

미명 앞에서도 스스러워하는 꽃이지


허나 좀 더 생각해보게나

그래서 통증 가운데 시를 쓰는 꽃이 되려면

보게나 자네 진즉

건실한 몸으로 시란 것을 계속 쓰고 있는

꽃인지, 아닌지,


꽃이 나의 소원이면

신께서 나를 모셔놓은 생의

어느 터에서든지


마음자리 가난하고 나직해지는,

그리하여 꿈처럼 시어에 닿는 사람이어야


지금 여기서 바로

여기서 꽃이어야


<여기서 꽃이어야>는 류혜란 시인의 시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다. 처음에 시는 시인의 마음이고 곧 삶이라 이야기했었는데 <노을미용실>이 시인의 삶을 보여준다면 <여기서 꽃이어야>는 시인의 마음을 드러낸다. 통증 가운데 시를 쓰는 꽃이 되려면 건실한 몸일 때에도 시를 써왔어야 한다 말한다. 실제로 시인은 건강이 좋지 않은 상황 가운데에서도 꾸준히 시를 쓰고 있다. 여기서 꽃이어야 다른 곳에서 꽃이라는 말도 마치 서울에서도 꽃이어야 남해서도 꽃이란 말로 들린다. 내가 서있는 자리와 상관없이 항상 같은 모습이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시는 시어들도 아름답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꽃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의미를 전하고 있어서 더욱 좋다. 나는 항상 앞으로나 뒤로나 같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해왔다. 그리고 겉과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을 경계한다. 그래서 스스로도 누군가를 험담하지 않으려 하고, 험담을 하는 자리에도 끼지 않으려 한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 누구에게나 수평적으로 대하려 노력했다. 그런 나의 삶의 태도와 가치관이 고스란히 담긴 시라서 더 좋았다. 어떤 사람이 여기서는 착하지만 다른 곳에서는 나쁘다면 그 사람은 착한 사람일까? 나쁜 사람일까? 언뜻 단순해 보이는 질문이지만 복잡한 세상에서는 선뜻 답을 내리기 어렵다.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착한 아빠인 사람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불합리한 갑질을 저지르는 직장 상사일 수 있듯이 말이다.

오늘 뉴스에 어느 유명한 청춘 멘토가 알고 보니 직원들의 임금을 체불하고, 폭언을 했다는 소식을 보았다. 청춘들의 꿈을 응원한다던 그 사람은 밖에서는 아름다운 꽃처럼 보였을지 모르지만 사람들의 눈이 없는 곳에서는 꽃이 아니었다. 낙조 이후에도 당당한 꽃이었다면 좋았을련만, 청춘들에게 보이는 모습만큼 자신의 회사에 다니는 청년들에게도 꽃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다.

세상 살아가며 욕심한 점 없이 살아가는 나이지만 그렇게 살다가도 힘든 순간이 오면 이 시를 나에게 읽어준다. 혹여나 내 마음을 속이고 싶어 질 때, 현실과 타협하고 싶어 지는 순간이 오면 "지금 여기서 바로 여기서 꽃이어야" 그래야 꽃이 될 수 있다고 되뇌어 준다.

올해 참석했던 서귀포 지역에서 열린 시 낭독 모임에서도 <여기서 꽃이어야>를 낭독했었다. 난 시를 읽는 것도 좋아했고, 직접 시를 짓는 것도 좋아했었다. 학교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동네서점에 들러서 얇은 시집을 사서 읽기도 하고, 생각이 깊어질 때면 노트 한편에 시를 쓰곤 했었다. 이제 시를 살만한 동네 서점은 거의 다 사라졌고, 시를 쓰는 법은 잊어버렸다. 처음 시를 좋아했던 계기는 어린 시절 일기 대신 시를 써도 괜찮다는 선생님의 이야기 덕분이었다. 일기장 한 페이지를 가득 채워야 하는 일기보다 짧은 시 한 편을 쓰는 게 어린 꼬마에게는 더 쉬워 보였다. 그렇게 시작했다. 시를 읽고, 시를 쓰는 것도.

<미>는 아름답다는 의미도 되지만 작고 미미하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서울이 아닌 남쪽 끝 남해에서 지역출판사를 하고, 그것도 가장 안 팔리는 분야인 시집을 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이 시들이 닿을 수 있을까?


시가 더 많이 읽히면 좋겠다.

사람들이 더 많이 시를 읽으면 좋겠다.


사람들이 더 많이 사랑하면 좋겠다.

그래서 모두 꽃이 되길.



p.s. 류혜란 시인의 시집을 구매하고 싶으신 분은 http://www.mongha.net 몽당출판사 홈페이지에서 주문하실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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